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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칩 하면 보통 컴퓨터 안에서 계산하는 부품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요즘 이 칩들이 생물학 실험실로 자리를 옮기고 있습니다. 수천 개 신경세포의 대화를 엿듣기도 하고, DNA를 읽어내기도 하죠. 그리고 최근 하버드 연구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칩으로 DNA를 '읽는' 게 아니라 아예 '쓰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도 물과 전기만으로요.
DNA를 만들려면 독한 용매가 필요했다
먼저 배경부터 짚어보겠습니다. 합성 DNA는 진단, 유전체 공학, 암 연구 등 현대 의학과 과학 곳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재료입니다. 그런데 이 DNA를 만드는 방식에는 오래된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합성 DNA는 '포스포아미다이트 화학'이라는 공정으로 생산됩니다. 수백만 개 서열을 한꺼번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검증된 기술이지만, 문제는 유해한 유기 용매를 잔뜩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대개 대형 중앙 시설에서만 작업이 가능하죠. 작고 안전한 탁상용 DNA 프린터 같은 건 꿈꾸기 어려웠습니다.
대안으로 주목받아온 것이 효소를 이용한 합성입니다. 물속에서 진행되고, 살아있는 세포가 실제로 DNA를 조립하는 방식에 훨씬 가깝습니다. 훨씬 온화하고 안전하죠. 하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서열의 수가 너무 적었던 겁니다. 기존 시스템들은 기껏해야 열두어 개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64개, 새로운 기준을 세우다
하버드 존 A. 폴슨 공학·응용과학대학원(SEAS)의 함돈희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이 숫자를 단숨에 64개로 끌어올렸습니다. 각 서열의 길이도 최대 39개 뉴클레오타이드에 달합니다. 병렬 효소 DNA 합성 분야에서 새로운 기준점이 세워진 셈입니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일렉트로닉스'에 발표됐습니다.
비결은 실험실 장비가 아니라 '전류'였습니다. 정밀하게 조절된 전류로 칩 표면 각 지점의 화학 반응을 하나하나 켜고 끄는 방식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언제 산성을 만들 것인가"
DNA는 뉴클레오타이드를 하나씩 이어 붙여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하나가 붙을 때마다 임시 '차단기'가 씌워져서 사슬이 제멋대로 자라지 못하게 막습니다. 다음 뉴클레오타이드를 붙이려면 이 차단기를 벗겨내야 하는데, 이 과정을 '탈보호(deprotection)'라고 부릅니다. 물속에서는 pH를 낮춰 산성 환경을 만들면 이 탈보호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진짜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64개 지점을 동시에 다루면서, 매 사이클마다 '지금 뉴클레오타이드를 받을 준비가 된 지점'에서만 정확히 pH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겁니다. 옆자리로 산성이 새어 나가면 엉뚱한 DNA까지 자라버리니까요.
두 개의 고리가 만든 정교한 울타리
하버드 칩의 해법이 참 영리합니다. 칩 표면에는 64개의 DNA 합성 지점이 있고, 각 지점 중앙에 DNA 가닥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두 개의 동심원 고리 전극이 감싸고 있습니다.
특정 지점에 뉴클레오타이드를 붙여야 할 때, 칩은 안쪽 고리에 전류를 흘립니다. 그러면 양성자가 생성되면서 DNA 가닥 바로 주변의 pH가 뚝 떨어지고, 효소 반응이 진행됩니다.
동시에 바깥쪽 고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전류를 끌어당깁니다. 바깥으로 퍼져나가려는 양성자를 붙잡아 소모해버리는 거죠. 일종의 화학적 방어막인 셈입니다. 덕분에 산성 구역이 옆 지점까지 번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매 사이클마다 활성화할 지점을 바꿔가며, 칩은 계속 모양이 달라지는 저pH 구역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64개의 서로 다른 DNA 서열이 완성되는 겁니다.
원래는 신경세포를 엿듣던 칩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 칩의 이력입니다. 이 실리콘 칩은 원래 DNA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함 교수 연구실의 전직 박사과정생 제프리 애벗이 신경세포의 대규모 세포내 기록을 위해 개발한 장치였거든요. 연구진은 처음에 이 시스템으로 수천 개 신경세포의 활동을 기록하고 수백 개의 시냅스 연결을 지도로 그려냈습니다. 나중 버전에서는 수만 개 연결까지 잡아냈고요.
그러다 칩 표면의 전극만 새로 설계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용도로 변신시킨 겁니다.
함 교수의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이 칩의 결정적 특징은 정밀한 전류 주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걸로 신경세포 막에 구멍을 내 세포 내부에 접근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전류 제어를 세포가 아니라 분자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신경세포용 전극을, DNA 합성을 위해 pH를 국소화할 수 있는 고리 전극 쌍으로 바꿔보자는 거였죠. 그리고 실제로 작동했습니다."
DNA에 텍스트를 저장하다
연구진은 이 기술의 미래 가능성도 함께 시연했습니다. 64개의 DNA 서열을 이용해 169바이트 분량의 텍스트를 인코딩한 겁니다. 디지털 정보를 DNA 분자 안에 담는 'DNA 데이터 저장' 개념의 소규모 실증인 셈이죠.
DNA 저장이 아직 먼 목표인 이유는, 이를 실현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DNA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물 기반 효소 합성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만들어야 할 DNA 양이 폭증할수록, 유기 용매와 화학 폐기물이 환경에 미치는 부담도 함께 폭증할 테니까요.
이번 연구의 공동 제1저자이자 현재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화학공학과 조교수인 정우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DNA 데이터 저장은 오늘날의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의 DNA 합성을 요구합니다. 바로 그래서 물속 효소 합성이 중요할 수 있는 겁니다. 64개를 훨씬 넘는 서열을 병렬로 합성할 수 있다면, 초대규모로 DNA를 써내려가는 친환경적인 경로가 열릴 테니까요."
실패한 실험이 알려준 진짜 병목
이번 연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64개에 성공한 연구진은 욕심을 냈습니다. 같은 칩에 합성 지점을 더 촘촘하게 배치해서, 더 좁은 면적에 더 많은 DNA를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해본 거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이 실패가 오히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처음에 연구진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전자 장치는 분명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거든요. 저pH 영역은 선택된 지점에 정확히 갇혀 있었습니다. 추가 실험 끝에 밝혀진 범인은 칩이 아니라 화학 반응 그 자체였습니다.
알고 보니 낮은 pH가 차단기를 직접 벗겨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산성 조건이 먼저 중간체 분자들을 만들어내고, 그 분자들이 실제 탈보호 작업을 수행하는 구조였던 겁니다. 문제는 이 중간체 분자들이 pH 울타리와 상관없이 옆 지점으로 슬금슬금 흘러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전기로 만든 울타리는 완벽했는데, 정작 그 안에서 태어난 심부름꾼이 담장을 넘어 다닌 셈이죠.
공동 제1저자인 하버드 박사후연구원 정한새 연구원의 정리가 명쾌합니다. "칩은 우리가 시킨 일을 정확히 해냈습니다. 선택된 지점에 저pH를 가둬뒀죠. 한계는 실리콘이 아니라 탈보호 화학에서 왔습니다. 이건 이 분야에 아주 명확한 다음 과제를 남깁니다. 칩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더 직접적인 산 기반 탈보호 화학을 개발하는 것이죠."
반도체 기술이 생물학과 만나는 지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경세포를 엿듣던 칩이 DNA 공장이 되고, 실패한 실험 하나가 다음 연구 방향을 정확히 짚어주고. 언젠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물과 전기만으로 필요한 DNA를 뽑아내는 날이 온다면, 그 출발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연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 논문: Woo-Bin Jung 외, "Parallel enzymatic DNA synthesis using a semiconductor chip", Nature Electronics (2026년 6월 17일), DOI: 10.1038/s41928-026-016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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